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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부정공>무본재공휘기신묘갈명(務本齋公諱基信墓碣銘)
務本齋公諱基信墓碣銘 公淳昌人也趙姓也基信諱也字曰聖一也務本其齋號也鼻祖諱璋高麗侍中也歷二世有功存宗社齊名圃牧者玉川府院君忠獻公諱元吉也入杜門洞不膺本 朝徵命者前副正虔谷諱瑜也父子同死於丙子六臣之禍者節愍公諱崇文敎官諱哲山也訓練院奉事諱宗元壬辰擧義於公爲七世也曰節制使世行曰通德郞東昌曰顯龜其曾祖祖禰也木川張氏泰毅其外祖也公以元陵庚辰二月二日生仁陵戊寅正月十八日卒享年五十九也配濟州梁氏命輔女有女士行生壬午卒癸卯壽八十二也無育以兄基孝子鎭龍爲嗣行義府使李台成長澤高在鎭二女婿也善浩珪浩兌浩璉浩星山李仁淳竹山安德洙妻鎭龍出也李炳儀高濟九高濟八高濟七高濟五高濟三高濟一外孫也善浩三男秉斗秉文秉周也二女廣州李秉權竹山朴埈植也珪浩二男秉準炳仁秉祚也兌湖一男秉哲二女海州崔東翼驪州李鍾承也璉湖一男秉年一女全州柳璿也今其主鬯者秉斗子淇煥也順天住巖面黃鷄嶝可葬洞丙原其幽宅也公質美性李生纔九月而失怙及長居常飮泣以不識父顔爲窮天之恨事母夫人一以無違爲主晨昏甘旨靡誠不彈每事必稟無敢射專三十年如一日或有不安節憂形于色問醫求藥不遑暇逸齊沐禱輒有應人皆異己未遭艱攀號擗踊如不欲生初終克襄誠禮無憾廬墓泣血竹爲之枯家人慮其嬴憊成疾請歸攝理而堅執不許以終三年自後省掃無曠月每當父母諱辰前期致齊洗滌烹飪躬自照管以致如在之誠將事之夕哀慟如袒括伯兄出后雖未同居友愛尤篤晨夕常侍以至沒世而替此其李悌之卓異也歲値大歉腆念周恤族戚鄕隣賴活甚重時知府托以賑濟勒行聚歛於境內饒戶公據法言其不可嘗以萬金債簿投之鬱攸七結田土補助宗家此其重義輕財之風殆末俗之所絶無也有子云孝弟爲仁之本曾傳云德者本也財末也觀於此可以知公之所務厥有所自來也公歿之百三年庚申墓石始具秉文氏狀事行屬永祚序而銘之前後踵門而固請者冑燮正煥也屢辭不獲敢此塞責人徵言輕恐不足爲世之徵信也銘曰爲仁之本曰惟李第猗公篤行始終不替後義先利末世膏盲荒年賙恤誦傳一鄕焚券惠人割地補宗本立道生餘可旁通空老立樊在公何傷未艾餘慶子孫必昌 月星 崔永祚 撰 무본재공휘기신묘갈명(務本齋公諱基信墓碣銘) 공의 휘는 기신(基信)이요 자는 성일(聖一)이며 무본(務本)은 그 재호(齋號)이고 순창 조씨인데 절민공(節愍公) 휘(諱) 숭문(崇文)의 후손으로 증조의 휘는 절제사(節制使) 세행(世行)이요 조의 휘는 통덕랑(通德郎) 동창(東昌)이며 고의 휘는 현귀(顯龜)이고 비는 목천장씨(木川張氏) 태의(泰毅) 여(女)이시다. 공은 영조경진(一七六○)년 二월 二일에 출생하여 순조무인(一八一八)년 정월 十八일 향년 五十九세로 별세하고 배는 제주량씨(濟州梁氏) 명보의 녀(命輔之女)로 여사(女士)의 행의가 있었는데 임오년에 출생하여 계묘년에 향년 八十二세로 후사없이 별세하여 형기효(基孝)의 아들 진룡(鎭龍)으로써 후사를 삼으니 행의(行義)가 있었고 부사(府使)이 태성(李台成) 장택(長澤) 고재진(高在鎭)이 여서(女婿)이다. 선호(善浩) 규호(珪浩) 태호(兌浩) 연호(璉浩) 성주이인순(星主李仁淳) 죽산안덕수(竹山安德洙)의 처는 진룡출(鎭龍出)이요 이병의(李炳儀) 고제구(高濟九) 고제팔(高濟八) 고제칠(高濟七) 고제오(高濟五) 고제삼(高濟三) 고제일(高濟一)이 외손이었다. 선호(善浩) 三남은 병두(秉斗) 병문(秉文) 병주(秉周)요 二녀는 광주이병권(廣州李秉權) 죽산박준식(竹山朴埈植)이며 규호(珪浩) 三남은 병준(秉準) 병인(秉仁) 병조(秉祚)이고 태호(兌湖) 一남은 병철(秉哲)이요. 二녀는 해주최동익(海州崔東翼) 여주이종승(驪州李鍾承)이며 연호(璉湖) 一남은 병년(秉年)이고 一녀는 전주유선(全州柳璿)의 처(妻)였다. 이제 그 주창(主鬯)한 자는 병두의 아들 기환(淇煥)이요 순천(順天) 주암면(住嚴面) 황계등가장동병원(黃鷄嶝可葬洞丙原)이 고의 유택이다. 공의 기질이 아름답고 천성이 효성스러워 출생후 겨우 아홉달만에 아버지를 잃고 장성하매 항상 눈물을 머금고 아버지 얼굴을 알지 못함으로써 하늘에 사무친 한으로 삼고 어머니를 섬기며 한결같이 뜻을 어기지 않기로 결심하고 어두운 새벽에도 좋은 음식을 정성을 다하여 봉진(奉進)하고 三十년을 하루같이 매양 일을 먼저 말씀드린 후에 행하며 혹 어머니가 병환이 나시면 금심스런 안색으로 지체없이 의원에게 문의하여 약을 구하여 드리고 목욕재계로 하늘에 기도하여 문득 응보가 있으니 사람마다 경이(驚異)하였다. 기미년에 상사를 당하매 휘어잡고 부르며 가슴을 두드리고 뛰며 살아남지 않을 것같이하고 초상장례에 유감없이 지성을 다하며 시묘하여 피눈물을 흘려 대가 따라서 마르니 집안 사람이 그 形容이 말이 아님을 걱정하여 돌아가 요양하라 청하나 고집하여 응종치 않고 三년을 마치었다. 이로부터 달마다 성묘하고 매번 부모 제일을 당하면 앞당겨 재계하고 제기세척과 제물 숙정을 몸소 스스로 관장하여 뫼시고 있는 것 같이 정성을 다하며 제사를 거행한 밤에는 애통을 초상때와 같이 하고 큰 형이 출계하여 비록 동거하지 못하나 우애가 더욱 독실하여 밤과 새벽으로 항상 모셔 평생을 변치 아니하니 이것이 그 효제의 탁이(卓異)함이었다. 큰 흉년을 만나 두텁게 생각하고 두루 구휼하니 족척향인(族戚鄕隣)이 덕택을 입어 살아난 자 심히 많았다. 때에 성주(知府)가 기민구제를 빙자하여 경내 부호에게 취염(聚歛)을 자행하니 공이 법에 따라 그 불가함을 말하고 일찍 만금채권을 불에 소화하고 七결전토를 종가에 보조하니 그 의리를 존중하고 재물을 경시한 풍은 자못 말속에 있어 절무(絶無)한 바로다. 유자(有子)가 효도와 공경은 인(仁)의 근본이요 재물은 끝이라 일렀으니 이로 보면 가히 써 공의 힘쓴 바가 그 소종래(所從來)가 있음을 알겠도다. 공이 별세하신후一○三년 경신(庚申)에 묘소에 비석을 비로소 갖추었고 병문(秉文)씨가 기록한 사행(事行)으로 영조에게 부탁하여 서명(序銘)할것을 전후 굳게 청한 자는 주섭(冑燮)과 정환(正煥)이었다. 여러번 사절하다 얻지 못하니 감히 이에 책망을 면하리요 사람이 경미하고 문사가 졸하여 족히 써 세대에 증신이 되지 못할까 염려하노라. 새겨 가로되 인의(仁義)의 근본은 오직 효도하고 공경한 데 있다하였으니(爲仁之本曰惟李弟) 거룩한 공의 독실한 행실이 시종 변치 아니하였도다(猗公篤行始終不替) 의리를 뒤로하고 이(利)를 먼저함은 말세의 폐습인데(後義先利末世膏盲) 흉년에 기민을 구휼한 행적이 온 고을에 전송하였고(荒年賙恤誦傳一鄕) 채권을 불살라 사람에게 혜택을 입히고 전토를 나누어 종가를 보조 하였네(焚券惠人割地補宗) 근본이 서고 도가 생겨나니 나머지는 가히 다 통하였네(本立道生餘可旁通) 헛되게 림천에 늙은 것이 공에게 무슨 부족함이 있으리요(空老立樊在公何傷) 여경이 진진하니 자손이 반드시 창성하리로다(未艾餘慶子孫必昌) 월성(月城) 최영조(崔永祚)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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